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엑토르 스카로네 (문단 편집) === 데뷔부터 월드컵까지 === 스카로네는 1898년 [[몬테비데오]]의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. 어린 시절부터 공을 차고 노는 걸 좋아했던 스카로네의 주요 훈련법은 집안의 울타리에 난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었다. 그렇게 축구 기술을 연마하던 스카로네는 15살 때 우루과이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[[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|나시오날]]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하였지만 체격이 작다는 이유로 떨어졌다. 보통 축구 선수가 어렸을 때 이런 스토리를 겪게 되면 자신을 버린 친정팀의 [[라이벌]]팀에 입단 테스트를 거쳐서 합격, 그리고 라이벌 팀에서 만날 때마다 [[복수]], 그리고 이 선수가 대단한 선수일수록 친정팀의 역사적 [[뻘짓]]으로 역사에 남곤한다. 하지만 진성 나시오날 [[빠돌이]]었던 스카로네는 나시오날의 지적대로 체격을 불려서 다시 테스트에 임했고 결국 합격했다. 나시오날에서 갓 데뷔한 19살짜리 공격수가 기존 축구판 무서운 줄 모르고 골을 때려박자 [[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|우루과이 대표팀]]에서 [[191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루과이|자국에서 열린 191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]]에 참가할 때 그를 뽑아갔다. 그리고 그는 전 경기에 출전[* 당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은 4개의 팀이 참가하는 풀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3경기면 전 경기 출전이다.]하여 2골을 넣으며 그를 뽑았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냈다. 게다가 서로 2승을 거둬서 사실상 우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[[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|아르헨티나]]와의 시합에서 결승골을 넣었다. 1대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이니 그야말로 만점짜리 활약이었고 스카로네는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. 게다가 그의 형인 카를로스 스카로네 역시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전 경기에 형제가 같이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. 그렇게 대표팀의 주축 멤버가 된 스카로네는 우루과이가 뭔가 중요한 대회에 참석하면 항상 명단에 올라갔다. 그리고 이 시기는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. 1920년대의 웬만한 중요 국가대표팀 대회 우승팀의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있었다. 또한 1926년에는 [[스페인]]의 [[FC 바르셀로나]]로 건너가서 18경기에 출전 17골을 넣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.[* 당시 [[FC 바르셀로나]]는 스페인 전체를 아우르는 [[라 리가]]의 출범 전이라 카탈루냐 지역 리그 소속이었다.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[[리오넬 메시]] 이전의 역대 클럽 최다 득점자이자 필리핀-스페인 혼혈로 유명한 [[파울리노 알칸타라]], [[주젭 사미티에르]] 등 바르셀로나 역사 초기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뛰고 있었다.] 그리고 월드컵 이전의 세계구급 무대인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올림픽]]에서 우루과이는 2연패에 성공했다. 스카로네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바르셀로나를 떠날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다시 나시오날로 돌아왔다. 그리고 스카로네는 올림픽에서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이탈리아]]를 상대로 골을 뽑아냄으로서 [[앙헬 로마노]]를 제치고 역대 우루과이 대표팀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. >우루과이를 생각했고,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1928년 올림픽]]이 다가온다는 것, 하늘색 유니폼과 나시오날도 생각했었습니다. 제가 사인을 안 하면 다시는 나시오날에서 뛸 수 없을 것 같았죠. 계약 마감일 전 마지막 제안을 하더군요. 5년간 3만 달러였습니다. 하지만 저는 나시오날과 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왔어요. >---- >엑토르 스카로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